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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2] 라이프아카데미 전문가특강7: 가치와 예술(전원경 작가)
날짜: 2022-01-17  |  조회수: 484

100년 전 빈(비엔나) - 유럽의 예술과 역사, 예술과 인간사이의 관계

 

벌써 2021 연세라이프아카데미에는 7번째 특강 날이 밝았습니다!! 이번 특강은 전원경 작가님께서 진행해주셨습니다. 전원경 작가님은 영국 런던 시티 대학교에서 예술비평 및 경영을 전공하셨고 영국 글라스고 대학교에서 문화 콘텐츠 산업을 연구해 박사학위를 받으셨습니다. 또한, 월간 [객석], [주간동아]에서 문화팀 기자로 활동하셨고 “영국, 바꾸지 않아도 행복한 나라”를 비롯해서 “예술가의 거리”, “페르메이르”. “예술, 역사를 만들다.” 등 예술과 문화와 관련된 책들을 출판하셨습니다. 이번 특강은 “백 년 전 빈”라는 주제로 진행되었습니다.

 

 

🎹음악의 수도 빈, 과거에는 시대착오적인 도시였다?

오스트리아 수도 빈은 작지만 화려한 도시라는 평가를 받는 도시입니다. 슈테판 대성당, 세계 3대 오페라 극장 중 하나인 빈 국립 오페라 하우스, 그리고 음악의 수도로 유명하죠.

우리가 어릴 적 한 번쯤은 들어봤던 음악가들이 대부분 오스트리아 빈에서 활동했다는 것을 알고 계셨나요? 모차르트, 베토벤, 슈베르트 등 많은 음악가가 빈에서 활동했답니다.

그렇다면 빈은 작은 도시임에도 불구하고 왜 많은 음악가가 활동한 도시가 될 수 있었으며, 작은 나라의 수도가 왜 이렇게 화려할까요?

오늘날 유럽의 지도를 보면 알 수 있듯이 현재의 오스트리아는 작은 국가입니다. 하지만 1차 세계 대전 전의 지도를 보면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1867-1918)은 매우 큰 국가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무려 현재보다 10배나 큰 국가였죠. 이때의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 안에는 11개의 다른 언어가 존재했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 11개의 다른 민족이 있었다는 거죠. 그렇다 보니 19세기 중반부터 오스트리아 – 헝가리 제국 안에는 각각의 민족들은 독립을 원했으나 당시 황제는 강력한 관료주의로 그들은 제압했습니다.

그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 (1848 – 1916)는 바로크적인 가치관은 가진 황제였습니다. 수세식 화장실도 사용하지 않고 자동차를 타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있었을 정도였죠.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은 1900년대 다른 유럽 국가들과는 다르게 의회를 해산하고 오히려 황제의 직접 통치 체제로 돌아갑니다. 즉, 1700년대의 유럽 상태로 돌아간 것이죠. 이런 상황에서 제국의 국민들은 정치적으로 할 수 있는 것들이 없어 많은 정치적 좌절을 겪었고 이를 예술에 대한 탐닉으로 해소하려고 했습니다.

위의 사진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당시 제국의 국민들은 화려한 의상, 왈츠와 같은 우아한 춤에 열광했습니다. 특히, 왈츠는 당시 빈 시민들의 중요한 사교계 수단이었습니다. 하룻밤에 무려 50군데에서 왈츠 무도회가 열릴 정도였죠. 이를 통해 당시 빈 시민들이 얼마나 왈츠에 열광했었는지를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계속 같은 노래로만 무도회를 진행하기에는 무리가 있죠. 여러분도 같은 노래를 계속 반복해서 듣다 보면 어느 순간 지루해지지 않나요? 그렇기에 이들도 새로운 왈츠를 작곡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많은 음악가들이 빈을 찾게 되어 지금의 음악의 수도가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또한, 이때 당시 프란츠 요제프 1세 황제는 도시계획으로 빈에 많은 건물들을 지었었는데 다른 국가들과는 다르게 빈의 도시계획은 시민들의 편의를 위한 것이 아닌 황제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 지어졌습니다. 황제를 위해 지어졌다 보니 건물의 양식들이 고딕 양식, 바로크 양식 등 모두 과거의 양식으로 지어졌답니다. 이러한 이유로 과거 19세기의 빈은 과거지향적인 도시, 시대착오적인 도시로 평가받고 있죠.


 

오스트리아의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

이러한 시대의 오스트리아에서 구스타프 클림트가 태어났습니다. 그의 별명은 장군이었고 그의 과감하고 앞으로 나가는 성향에서 비롯된 별명이라고 하죠. 그는 전형적인 바로크 양식의 그림을 잘 표현했다고 합니다. 오스트리아의 당시 황제가 프란츠 요제프 1세다 보니 클림트는 이 재능으로 일찌감치 기회를 얻어 빈 황실공예 학교에 입학하게 되었고 17살에 예술가 컴퍼니라는 회사를 설립하게 됩니다.

19세기에서 20세기로 시대가 변화하면서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 외의 유럽에서는 화가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의 불안을 작품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먼저, 스위스의 화가 뵈클린의 죽음의 섬과 같이 상징주의가 있었습니다. 이 상징주의는 존재하지만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그림으로 표현하는 유파입니다. 예를 들어, 기억, 꿈, 죽음, 영혼 등을 그림으로 표현하는 것이죠.

그리고 노르웨이의 화가 뭉크의 절규와 같이 표현주의도 있었습니다. 화가의 본인의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대상의 형태까지도 왜곡 시킬 수 있는 강렬한 표현을 표현주의라고 합니다.

오스트리아 빈에서도 이런 비슷한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이라는 책이 보수적이었던 당시 빈의 사회에 큰 파문을 일으켰습니다. 이 책에서 주장하는 것 중 하나는 “모든 인간에게는 성욕이 있다. 갓난 아기에게도 성욕이 있으며 남자아기는 자신이 처음보는 여성인 어머니를 범하려고 하지만 자신과 어머니 사이에 넘어설 수 없는 강력한 적, 아버지가 있기 때문에 아버지를 제거할 욕망을 가지게 된다. “있습니다. 이러한 학설이 당시 보수적인 빈 사회에서는 큰 반발이 있었지만 지식인 들은 이 학설이 가지고 있는 잠재력, 의미에 주목하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빈에 젊은 예술가들이 모였습니다. 젊은 예술가들은 해묵은 역사주의 방식에 그림만 그리는 과거의 예술가들에게서 자신들을 분리시키겠다며 빈 분리파를 결성하게 됩니다. 이 빈 분리파의 초대 회장이 바로 구스타프 클림트입니다.

클림트의 그림은 빈 분리파에 수장이 되면서 많이 변하게 되었습니다.

 

 

1902년에 빈 대학에서는 클림트에게 의학, 법학, 철학, 3개의 주제의 천정화를 청탁하였습니다. 위의 그림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과거의 클림트 그림이랑은 많은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죠. 빈 대학은 학문의 승리를 상징하는 그림을 원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위의 그림은 오히려 학문의 패배로 해석할 수 있는 듯한 그림이죠. 그렇기에 당시 빈 대학의 교수들은 이 천정화를 받아드릴 수 없다며 서명을 하게 되고 이로 인해 당시 빈 문화 교육부 장관이 사임하는 일이 일어나면서 결국 클림트는 이 사건을 계기로 더 이상 청탁을 받지 않겠다며 선언하게 됩니다.

 

이후의 클림트는 청탁을 받아 그린 그림이 아닌 자신의 의지로 그림을 그렸으며 과거의 미술기법들을 활용하여 자신만의 그림을 그렸습니다.

 

 

질의 응답 시간

질문: 클림트가 당시 빈 사회에서 진보적인 사상들을 보여는 작품들을 많이 그렸고, 이를 표현하기 위해 과거의 미술기법들을 사용하였는데, 이러한 것들이 클림트가 무엇을 의도하였는지에 대한 전원경 작가님의 생각이 궁금합니다.

답변: 예술에 있어서 무언가를 표현할 때 꼭 의도가 있어야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많은 예술가들은 청탁을 의해 창작을 하게 되고 그 안에서 자신의 그릴 수 있는 최상을 보여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클림트도 자신이 구현할 수 있는 최상의 아름다움을 과거의 미술기법들을 활용하여 구현해낸 것일 뿐 의도나 메시지는 오히려 그 작품을 보는 사람들이 찾아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질문: 클림트의 그림에도 외설적으로 자극적인 요소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관능적 예술의 분기점과 관련해서 질문 드리고 싶습니다. 포르노와 같은 외설적인 비디오를 예술이라고 부르지 않으나 영화 아가씨와 같이 감독이 만든 외설적인 영상은 예술성을 인정받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포르노와 예술의 경계는 어디일까요?

답변:클림트는 도덕적인 사람이 아니었으나 그의 그림은 예술적으로 인정받고 예술가입니다. 포르노와 예술의 경계는 무엇인가에 대해 답변을 하자면 그 경계는 사람마다 다르고, 다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 개인의 욕망을 추구하는 것에서 끝나면 욕망이라고 생각하고 그 욕망에서 그치지 않고 욕망을 넘어 인간의 본질적인 이야기를 한다면 그것은 예술이라고 생각합니다.

질문: 예술이 과거 유럽에서는 국가마다, 또는 지역마다 여러가지 형태로 다양하게 발전되었습니다. 이는 서로 간의 단절되었기에 독자적인 형태를 가지게 된 것인가요? 현재로 들어오면서 예술의 방향이 바뀌고 많이 모호해졌다고 생각합니다. 과연 이것이 시간의 흐름에 인한 변화인 것인지, 아니면 세계화가 진행되면서 하나의 미술 형태로 집약이 된 것인지, 예술이 단합되는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나요?

답변: 이 질문은 1시간을 걸쳐야 자세히 설명할 수 있는 질문인 것 같습니다.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프랑스 혁명 이전에는 예술가들이 교회, 군주, 귀족 등에게 고용되어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예술가들은 그들의 원하는 작품을 청탁하여 창작하기만 하면 됐었고 교회면 종교적, 군주면 그리스 신화, 역사화, 전투화, 귀족이면 초상화 등 예술의 방향성이 일정했고 명확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 대혁명 이후 귀족, 군주가 몰락하고 교회의 세력도 약해지면서 예술의 소비자가 소수의 귀족, 군주, 교회가 아닌 다수의 부르주아가 되었습니다. 다양하고 많은 사람들의 소비가 시작되면서 그들의 원하는 바가 다양해지고 지양하는 바가 모두 달라지게 되었습니다. 예술가들이 소비자가 원하는 바를 모두 다 맞출 수 없으니 예술가 본인의 본연에 충실한 작품들이 많아지고 다양한 형식, 작품에 주제 또한 다양해졌습니다. 이는 음악도 마찬가지입니다.

20세기에 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많은 지성인들과 예술가들은 현대 문명이, 지성이나 이성이 전쟁을 중단할 수도, 예방할 수도 없는 것에 충격을 받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예술가들이 예술을 통해 절망, 불안, 고통, 슬픔을 표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더 이상 예술이 던지는 메시지가 과거처럼 안정적이고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자기 파괴적이고 불안하며 괴롭고 죽음 앞에서 인간이 느끼는 공포 등 오히려 예술을 보는 이들을 불편하게 하는 작품들이 많아졌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는 현대 미술가들의 의도로 해석할 수 있다. 과거에는 객관성이 어느 정도 담보 되어있었으나 이제는 객관성이 사라지고 화가 개인의 주관만 남다 보니 주관의 강도가 높아져 화가의 의도, 관념을 소비자가 이해할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르른 것 같습니다. 그러나, 21세기부터 다시 합쳐지는 듯한 양상을 이루는 것 같고 다시 편안하고 아름다운 그림들이 많아지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예술가들의 주관이 극도로 강해지기 시작했던 20세기 말이 끝나고 21세가 시작되면서 예술가와 소비자의 시선이 조금씩 다시 수렴하는 시기가 온 것 같습니다.

 

 

구스타프 클림트 화가의 그림들을 살펴보면서 당시 오스트리아의 사회와 문화 등 역사에 대해 알 수 있었고, 특히 과거에는 오스트리아가 다른 유럽국가들과는 다르게 보수적이고, 과거지향적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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